#워크스

2017.11.30

WOO! BOOK CLUB: 제가 이 책 디자인했습니다-여성 북 디자이너들의 대화


2017년 10월 14일 토요일 오후 2시 ! (!)의 세 번째 이벤트 ‘제가 이 책 디자인했습니다’가 열렸다.

‘제가 이 책 디자인했습니다’는 여성 디자이너 정책 연구 모임 우(WOO)의 스터디 팀 우! 스쿨(WOO! SCHOOL)에서 준비한 우! 북 클럽(WOO! BOOK CLUB) 두 번째 프로그램으로, 페미니즘 도서를 디자인한 여성 북 디자이너를 초청해 페미니즘 도서의 작업 과정과 여성 북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주제로 대화를 나눠보는 시간으로 계획됐다.

네 명의 여성 디자이너―«이갈리아의 딸들»(황금가지, 1996) 개정판을 디자인한 김다희, «우리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봄알람, 2016)을 디자인한 우유니게,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를 디자인한 정은경, «엄마는 페미니스트»(민음사, 2017)를 디자인한 최정은이 그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들려줬다.

이날 대담은 두 챕터로 나눠 진행됐다. 1부에서는 각자 작업한 페미니즘 도서 이야기가, 2부에서는 여성 북 디자이너로서의 삶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것을 옮긴 이 글은 대담을 진행한 두 사회자―디자이너 김소미와 오새날이 네 패널에게 던진 일곱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네 패널의 답변으로 구성된다.


사회
김소미(눈디자인), 오새날(도서출판 마티)

패널
김다희(민음사 출판그룹 민음인), 우유니게(봄알람), 정은경(사이행성), 최정은(민음사 출판그룹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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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 안녕하세요. 저는 눈디자인의 그래픽 디자이너 김소미입니다. 하이파이브! (짝!)의 우! 북 클럽 세 번째 프로그램을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이 책 디자인했습니다’는 페미니즘 도서를 디자인한 여성 디자이너분들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는 시간입니다.

오새날: 안녕하세요. 저는 함께 사회를 맡은 도서출판 마티의 디자이너 오새날이라고 합니다.

김소미: 여기 우! 북 클럽에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페미니즘 혹은 퀴어 관련 도서가 130권 정도 모여 있는데요. 나름의 기준으로 젠더·여성·소수자·가족·노동·인권을 다루는 책들을 선정한 것입니다. 서가를 구성한 정아람 씨가 어제 우! 북 클럽의 첫 번째 프로그램 ‘북 클럽 프리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 책들이 어떤 인식론적 싸움에서 동반자 역할을 할 것이다. 이 자리를 기획하면서 가진 생각도 어찌 보면 비슷한 맥락인데요. 근 몇 년 한국에서 일어난 어떤 흐름들―페미니즘의 빅뱅 혹은 뉴웨이브라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는데―속에서 기념비적인 역할을 한 책들을 앞에 두고, 그것을 작업한 디자이너를 만나 얘기를 들어보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오늘 모신 네 분이 작업한 책들 모두 주요 서점 사회학·젠더 분야 베스트셀러에 들어가 있어요. 페미니즘 도서 중에서도 중요한 의제를 다루는 책인 셈입니다.

오새날: 말씀을 들려주실 디자이너분들과 작업하신 책들을 짝지어 소개하겠습니다. 제 바로 옆에 계신 분부터,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디자인하신 정은경 님입니다. 두 번째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엄마는 페미니스트» 디자인하신 최정은 님입니다. 세 번째로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 디자인하신 김다희 님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민경의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디자인하신 우유니게 님입니다.


   ⑴어떤 책 디자인했나요? 

김소미: 책 소개부터 시작해볼게요. 출간 순서로 보면 «이갈리아의 딸들»을 가장 먼저 얘기해야 될 것 같아요. «이갈리아의 딸들»은 노르웨이 출신 소설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가 1977년에 쓴 유명한 고전이죠. 여성과 남성이 현실과 반대 상황에서 살아가는, 웹사이트 ‘메갈리아’ 때문에 모두 아시겠지만 정말 미러링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인데요. ‘움’이라는 가상의 세계관 아래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작년에 리디자인됐는데, 김다희 님이 그 리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셨어요. 프로젝트의 시작과 과정에 대해―특히 삽화가를 섭외해서 진행한 작업이고, 개정판이다 보니 전작과 달리 어떤 지점을 차별화했는지 궁금한데―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다희: 초판 디자인을 같이 보려고 가져왔습니다. 이 책은 1996년에 처음 발행됐고, 민음사 출판그룹 장르문학 브랜드인 황금가지가 출간한 첫 책이에요. 20년 동안 절판되지 않고 70쇄를 찍은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하고요. 출간된 지 오래된 탓에 본문 디자인과 조판 상태가 좋지 않아 읽기 힘들다는 불만이 많았어요. 그러다 작년에 페미니즘 이슈가 떠오르면서 판매 속도가 급격히 올라갔고, 회사 내에서도 디자인을 다시 해야겠다는 이야기가 나왔고요. 마침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리커버 열풍이 불고 있을 때라 개정판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20년 전에 나온 초판 표지는 당시 미술부 부장님께서 직접 그리셨는데 작가와 원 저작권사에서 무척 마음에 들어 했대요. 남녀가 바게트 빵처럼 연결된 모습이 소설과 자연스레 이어지는 느낌이었고요. 다시 디자인하는 입장으로서 부담스러웠습니다. 소설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아름다운 책을 만들어야겠으니.

디자인에 들어가기 전 책을 읽으면서 이갈리아라는 가상 세계가 굉장히 현실처럼 느껴졌고, 오래 전에 쓰인 소설 같지 않아 충격적이었어요. 이러한 현실감을 디자인적으로 풀어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집트 벽화를 떠올렸어요. 이집트 벽화가 2차원적인 방식으로 사람과 상황을 표현하는데, 그런 설정을 가져오면 옛날에 존재했던 세계가 마치 우리가 겪은 시간인 듯한 느낌을 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때 참고했던 이미지가 (화면을 가리키며) 저런 것들인데, 제 역량으로만 풀어 나가기엔 부족하다고 느껴져서 담당 편집자분과 논의 후 그림 작가를 물색했어요. 환상적인 화풍이면서도 사실적인 묘사력이 좋은 박혜림 작가님이 잘 소화해주실 것 같아서 함께하게 됐고요. 이갈리아의 중심인 움(여성)이 크게 자리를 잡고, 그 주변으로 내용과 맞는 그림들이 벽화처럼 그려졌습니다. 디자인 작업은 그림을 돋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마무리했어요. 제책이나 후가공, 전체적인 책의 인상은 한정 양장판인 만큼 독자분들이 선물 같은 느낌을 받게끔 했고요. 초판 한정으로 찍은 삼천 권이 생각보다 빠르게 소진되어 급하게 재판을 찍었고, 소진 후에는 무선 일반판으로 내서 지금까지 판매 중입니다.

오새날: 다음으로 «나쁜 페미니스트»를 작업한 디자이너 정은경 님께 질문하고 싶은데요. 이 책이 한국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고, 많은 사람들이 ‘나 페미니스트야’라고 선언하도록 이끌었다고도 할 수 있잖아요. 이를 디자인하게 된 계기와 작업 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은경: 사이행성은 이 책이 나올 무렵 생긴 신흥 출판사예요. 부부가 공동 대표인데 책 기획은 주로 김윤경 대표가 해요. 연락이 와서 만났죠. 디자인을 꾸준히 맡아줄 디자이너를 찾고 있었대요. 그 미팅 때 들떴던 기억이 나요. 보통 ‘서점에서 어떤 책 작업하신 거 보고 왔어요’ 하거든요. 그리고 요구 사항을 말해주잖아요. 그런데 김 대표님은 제 작업 전체가 마음에 들었고, 원고를 보고 제가 느낀 것을 반영하면 아마 그게 자기가 원하는 방향일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문학과지성사에서 일할 때는 원고를 읽고 스스로에게 충실한 작업을 하면 내부에서도 만족스러워했는데, 프리랜서로 일하면서는 일단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쪽을 우선 고려하는 작업이 많을 수밖에 없거든요. 굉장히 감사하면서도 무거운 의뢰를 받은 거죠.

그럼에도 처음 협업하는 출판사와의 첫 작업은 항상 어려워요. 서로의 화법이 아직 낯설기 때문에 ‘내가 저 사람 말을 제대로 이해한 걸까?’ 하는 의심을 항상 가질 수밖에 없거든요. 만나서는 생각이 비슷하다고 해도 막상 작업을 해보면 다를 수 있고요. «나쁜 페미니스트»를 진행할 당시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가 많이 팔리면서 회자가 됐어요. 보통 클라이언트는 같은 계열에서 잘 나간 책의 디자인을 마음에 담는 경향이 있거든요. 일단 제 생각대로 작업을 진행하면서도 이 점을 예상해서 다른 시안도 작업했어요. 흰 바탕에 검정과 마젠타만 쓴 원서 디자인을 고려해서 그런 풍의 시안을 하나 더 했죠. 그런데 너무나 감사하게도 이것으로 바로 결정해주셨고요. 그리고 핑크 얘기를 많이들 하잖아요. 근데 왜 그 얘기를 하는 건지 사실 잘 모르겠더라고요.

김소미: 막상 책을 읽어보면 그런 오해가 안 생길 것 같은데요. 제목이 곧장 >센캐<로 이어지다보니 ‘나쁜 페미니스튼데 왜 핑크지?’라고 생각이 흐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질문이 되게 많더라고요. ‘페미니즘 도서라면서 왜 다 핑크색을 쓰지?’

정은경: 록산 게이가 하는 얘기가 있죠. 핑크를 좋아한다고 해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는 게 아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는데요. 우리나라에 한창 페미니즘 바람이 불 때였고, 어떤 수업에 들어가도 여성학적인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게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쟤는 페미니스트야’라고 할 때 그의 어떤 특징을 집었는지 가물가물했는데, 자기주장이 강한 나 같은 여자들을 페미니스트라고 불렀던 기억이 이제야 떠오르는 거죠. 그런데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페미니즘을 그렇게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페미니즘 책인데 왜 핑크색을 썼어?’ 하는 질문이 처음에는 의아했어요. 저 핑크 좋아하거든요.(웃음) 어떻게 이 색을 안 좋아할 수 있는지! 심지어 이런 지론도 있어요. 세상 남자들한테 한 달에 하루를 정해 핑크색 옷을 입히면 전쟁이 줄어들 거라고. 농담이 아니라 색의 영향력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앞선 록산 게이의 핑크색에 관한 언급이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개념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는 상징적 문장이기 때문에 핑크를 쓰고 싶다고 했더니 대표님도 좋아하셨고요.

그리고 표지의 이 네모의 의미에 대해서 엊그제 처음으로 대표님과 얘기를 나눴는데요. 책이 나왔을 때 언론사에서 네모의 의미를 설명해달라는 문의가 있었대요. 그때 저한테 연락하셔서 ‘제가 생각하는 그 의미 맞죠?’ 하시길래 ‘네 맞아요’ 그랬거든요. 서로 그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를 나누지 않았던 거죠. 대표님은 그렇게 이해하셨대요. 모자란 네모. 그러니까 부족한, 꽉 닫히거나 완성되지 않은, 그래서 이 ‘나쁜’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제 무의식에 그런 게 있었을 수도 있고요. 사실 제 의도는 모양 그대로 문이었어요. 열린 문. 그런데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준 건지,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에게 문을 열어준 건지. 저는 후자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드세 보이고, 결혼 안 할 것 같고, 핑크색 안 좋아할 것 같고. 그런 이미지가 곧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개념의 벽을 깨는 책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했어요.

김소미: 감사합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봄알람의 디자이너 우유니게 님에게 마이크를 넘길게요. 봄알람은 2016년 한국을 뒤흔든 강남역 살인 사건을 지켜본 저자 이민경 님이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입을 열겠다는 다짐 아래 «우리에게 언어가 필요하다»라는 책을 쓰면서 만들어진 출판사죠. 어떤 사람들에겐 또 스스로 입을 여는 과정이 된 책인 것 같아요. 간단히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유니게: 말씀하셨듯이 작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혐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잖아요. 저도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그 사건을 겪으면서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 찼어요. 그래서 뭘 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온라인에서 이민경 작가가 요즘 여성들이 여성혐오에 대한 반감이 섞인 질문을 많이 듣는 것 같다고 말하더라고요. ‘이게 왜 여성혐오야?’ 이런 질문들. 그에 어떻게 잘 대답할 수 있을까,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게 맞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이었어요. 팀원들이 거기에 붙은 거죠. 나도 돕고 싶다면서. 디자이너가 오고, 편집자가 오고, 그렇게 4명이 뭉치게 됐어요. 처음에는 책의 형태가 될지 몰랐는데, 생각보다 양이 늘어났고, 그래서 텀블벅을 냈고, 너무 잘됐어요. 텀블벅 펀딩으로 만든 1쇄를 5천부 가까이 찍었는데 >순삭<된 거예요. 그 뒤로도 이걸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계속 있어서 재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출판사를 만들었어요. 디자인도 새로 해서 2판으로 냈고요. 처음에 굉장히 급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긴 하는데, 많은 분들이 페미니즘 분야에서 기존에 없던 가볍고 유쾌한 느낌을 좋아해주셔서 잘된 것 같아요. 내용도 매우 좋았지만.

오새날: 표지의 입술 모양 캐릭터에 대한 얘기를 해주실 수 있나요? 저게 뭘까요?

우유니게: 저건 입술이고요.(웃음) 일차원적으로 생각했어요. 누가 봐도 가볍고 쉬운 책이다. 페미니즘이 전혀 어려운 게 아니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그래서 캐릭터 일러스트를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이니까 입을 사용하자, 이렇게 단순하게 접근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저희 내부적으로 이 입을 ‘입트페몬’이라고 부르는데, 처음에는 ‘아가리파이터’라고 불렀어요. 이 약했던 아가리가 단련을 하고 강해지는 과정을 내부 삽화로 넣은 거예요. 아가리파이터가 스타트 라인에서 달리기 시작해 여러 가지 스포츠를 하며 근육을 키우는 장면들이 도비라(장을 구분하는 속표제지)마다 들어가 있어요. 내용을 가볍게 받아들이도록, 답답하고 짜증나게 하는 >고구마< 문장으로 기분을 잡쳤을 때 쉬엄쉬엄 가라앉힐 수 있도록 디자인했습니다.

오새날: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엄마는 페미니스트»를 작업하신 디자이너 최정은 님께 질문드리고 싶은데요. 원작에는 일러스트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제로퍼제로의 일러스트레이터 진솔 님의 그림이 들어갔잖아요. 그 계기라든지, 저자와 어떤 의견을 주고받으셨는지, 디자인 제작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정은: 사실 제가 페미니즘 책을 즐겨 읽는다거나 그런 이슈에 평균 이상의 시선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서, 이 책의 출간 일정을 받고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를 알게 됐어요. 전작에 대한 인식이 없었는데 ‘많이 팔아야 되는 책이다’ ‘전작이 굉장히 잘됐다’ 이런 부담을 많이 받았죠. 일단 편집자가 진솔 님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첫 회의를 가졌어요. 페미니즘이라는 주제가 너무 어렵거나 세지 않고 따뜻해 보이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고요. 또 하나는, 부수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이유인데, 번역을 해놓고 보니 원고 분량이 너무 안 나오는 거예요. 좋은 내용인데 분량이 적어 내용이 없는 책처럼 보이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있었어요. 일러스트를 넣어서 페이지 수도 늘리고 텍스트가 조금 헐렁해도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책처럼 보이면 좋겠다 싶었어요. 묘사가 많지 않아 동화적인 느낌이 있는 진솔 님의 그림과 텍스트의 헐렁한 느낌이 잘 맞아떨어져서 본문 작업을 끝내고 보니 편집자의 선택이 괜찮았구나 생각했어요.

진솔 님은 아이와 엄마, 가족 등을 주제로 개인 작업도 많이 하셨기 때문에 조금 다른 주제이지만 표지 그림을 자연스럽게 잘 잡아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책 내용이 제안별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각 제안에 맞게 그릴 수 있는 건 그리시고, 어떤 제안은 이미지로 형상화할 수 없는 것도 있기 때문에 그리기 편한 주제로 작업하시면 저희가 적절히 배치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각 그림이 어떤 제안에 해당하는지 따로 내용을 받지 않았는데, 각각을 어떤 제안에 넣을까 한 번 더 해석하는 단계가 개인적으로 재밌었어요. 본문 작업 끝내고 진솔 님한테 보여드리면서 혹시 의도와 다르게 배치된 그림이 있는지 확인을 받았는데, 그런 건 없다고 하셔서 그대로 진행했죠.

제목을 정하는 과정 혹은 관련 굿즈의 카피를 뽑는 과정에서는 편집자, 디자이너, 마케터, 모두 여성이었는데 각각 생애 주기가 달라(미혼자, 기혼자, 기혼자+엄마) 소소한 의견 차이가 있었어요. 제목으로 ‘엄마는 페미니스트’ ‘페미니스트가 아이를 키운다면’ ‘페미니스트 선언’ 등 몇 가지 후보가 있었는데요. 미술부가 제목 짓는 부서는 아니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전제가 너무 분명한 책이라 페미니스트라는 큰 주제를 다뤄도 ‘엄마’ ‘아이를 키운다’ 그런 키워드도 들어가는 게 맞겠구나 싶었는데, 마케터는 꼭 그렇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점, ‘엄마’ ‘육아’ 등에 치우치는 쪽으로 마케팅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미묘한 차이를 보면서 여성들끼리도 페미니즘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게 흥미로웠어요.

오새날: 감사합니다.


   ⑵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은? 

김소미: 얘기 잘 들었습니다. 책 내용도 간단히 말씀해주셨는데요. 디자인 작업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문장이 있다면 소개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우유니게: «우리에게 언어가 필요하다»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라면, 많은 분들이 위로를 얻었던 부분이 있다면 “당신에겐 대답할 의무가 없다”는 문장이에요.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책이기도 한데 사실 그동안 대응을 너무 많이 했잖아요. 저도 그 당시에 가까웠던 남자 사람과 많이 싸웠어요. 어떤 날은 친절하게 설명하려 했고 어떤 날은 강하게 부딪히기도 했는데 다 부질이 없더라고요. 이런 사람과 대화를 지속하면 내 에너지만 소모되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걸 멈추진 못했고요. 대답할 의무가 없다는 건 너무 간단한 사실인데, 제 머릿속에 그런 선택지가 없었던 거예요. 이 책에서 그 문장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는 이 문제에 대해서 결별해도 되겠다는 옵션을 갖고 마음이 평안해졌고요. 저와 마찬가지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안정감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오새날: >사이다< 문장인 것 같아요. 저도 그 부분을 읽고 앞으로 사람 거르는 필터를 가져도 되겠구나, 절교해도 되겠구나 싶었어요.

김소미: 안되겠으면 이 책 덮어라, 이제 그만 봐라, 나는 더 얘기할 필요 없다, 책에서 아예 그렇게 나오잖아요.

우유니게: 그런 마인드셋을 주는 게 가장 우선적인 목표였던 것 같아요.

김다희: 저는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면서 멋있는 문장이라기보다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무척 와닿는 문장이 있었어요. 읽어드리자면, “움은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어. 움은 임신을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움은 뚱뚱해지기도 하고 날씬해지기도 하지. 움에게 이상적인 체형을 정한다는 것은 우스운 거야.”

제가 초등학교 1학년, 세  살짜리 남매를 키우고 있는데요.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면서 몸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살이 찌면 찐 대로, 빠지면 빠진 대로. 처음에는 ‘어? 내가 관리를 못하는 건가’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까 주변 사람들이 임신 출산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자연스러운 몸매 변화에 대해 굉장히 쉽게 얘기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 문구를 읽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거구나’라는 생각을 했고요. 큰 애를 학교에 보냈더니 사람들이 이번에는 육아에 대해서 쉽게 얘기하는 거예요. 애를 키우는 방식이라든지, 엄마로서의 역할이라든지. 자기 기준을 만들어놓고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해요. 그런 게 불편하고, 일과 육아를 함께 하는 사람으로서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분이에요.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존중해주는 태도를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김소미: 그걸 또 여자의 언어로 말하는 게 아니라 남성 캐릭터로 말하잖아요. 그렇게 돌려놓고 말하니까 더 확 느껴지는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김다희: 그래서 표지에 임신한 여자를 넣자고 박혜림 작가님과 이야기했어요. 읽으면서 꼭 임신한 여자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웃음) 저도 겪었을 뿐더러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오새날: 남자가 뚱뚱하면 ‘풍채 좋으시네’ 마르면 ‘샤프하시네’ 미화하는데, 여자는 무조건 어떤 정형화된 몸매가 있는 것처럼.

김다희: 뉴스 기사를 보면 출산 후 복귀한 여자 연예인한테 ‘애 낳은 엄마 맞아?’ 이런 제목을 잘 붙이잖아요. 정말 싫어요. 애 낳았다고 사람 생긴 게 갑자기 변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기준을 삼고 날씬하게 돌아오지 못하면 그걸 탓하는 분위기.

최정은: «엄마는 페미니스트»는 워낙 쉽게 접근하는 책인데요. 4살 아이를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너무 공감된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이기도 한데―굉장히 새롭진 않았고, 일상적으로 품게 되는 생각들을 잘 정리된 언어로 만난 것 같았어요. 유사 페미니즘에 대한 용어들은 좀 새로웠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책의 두 번째 제안 중 “도움이라는 표현을 거부할 것”인데요. 육아를 하면 많이들 물어봐요. ‘남편이 많이 도와줘?’ 실제로 남편이 많이 도와주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도와준다는 이 표현 자체가 틀린 거죠. ‘남편이랑 같이 해?’가 맞죠. 여성은 당연히 하는 거고, 남편이 하면 도와주는 거고. 심지어 친정 엄마도 저한테 ‘그래도 아무개 아빠는 많이 도와주는 편이야’라고 말해요. 회사에서도 남편이 육아 때문에 양해를 구하면 여성 동료들에게 좋은 남편이고 좋은 아빠라고 칭찬을 받아요. 그걸 보면 어딘지 모르게 씁쓸하거든요. 남편이 아무리 많이 협조해도 주변 환경에 의해서 많이 느끼는 부분인데, 정리된 문장으로 만나서 강렬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정은경: 저는 «나쁜 페미니스트»를 읽으면서 딱히 무릎을 탁 치는 문장이 있었다기보다, 록산 게이가 밝히기 힘든 개인적인 아픔을 얘기하는 부분을 읽고 되게 놀랐어요. 그런 얘기를 함으로써 글 전체에 굉장한 힘을 부여해요. 또 이런 문장은 정말 솔직해서 존경스러웠는데, 읽어드릴게요. “나는 독립적이고 싶다. 하지만 누가 우리 집에 와서 나를 챙겨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직업이 있고 능력도 인정받고 있다. 여러 가지 책임을 완수하고 있다. 나는 여러 중요한 모임 활동도 하고 있다. 날 존경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내 조언을 얻으려고 한다. 나는 전문가가 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의 인정을 받기 위해 남보다 더 이를 악물고 달려야 한다는 사실에 울적할 때가 있다. 나는 가끔 직장에서 울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내 사무실 문을 닫고 울기도 한다. 책임지고 싶고 존경받고 싶고 자기 관리를 잘 하고 싶지만 내 인생의 어떤 면에서는 완전히 항복해 버리고 싶다. 어른이 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나?”

저는 중학교 3학년인 딸이 있고요. 어디 가면 칭찬을 듣는 남편이랑 20년 가까이 살고 있는데요.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교차할 때 잠깐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일을 했어요. 여러 역할을 하며 살고 있어서 공감이 갔나 봐요. 잘 해내려다 보니 슈퍼우먼처럼 다 감당하며 안고 가는 게 습관이 됐는데, 저 문장을 읽고 나를 비롯해 여성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어요. 생각하니 분노도 올라왔고요. 페미니스트로 살려면 지치지 않고 투쟁을 해야 되는데, 또 한편으로는 개인적이고 공시적인 나의 상태로만 보면 굉장히 현명해야 이 삶을 불행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희생도 감수해야 하고, 그것에 스스로 화가 나지 않도록 자기를 컨트롤해야 하고. 동시에 야금야금 투쟁해야 하고.

“어른이 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나?” 하는 마지막 문장이 와닿은 건, 제 삶과 남편의 삶이 비교돼서. 나는 어른이 될 수밖에 없는 삶인데. 종종 남편한테 불만으로 얘기하는 게 ‘총각 때랑 뭐가 다르냐’거든요. 삶의 양태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거죠. 어쨌든 그 차이를 줄여야 하고 남편도 더 노력하겠지만 금세 줄어드는 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불균형을 이해하고 안고 살아가야 된다는 것. 결국 록산 게이가 고백하는 것처럼 너무나 힘들고 다 그만둬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스스로 후회되는 부분도 있고요. 그냥 ‘내가 집에 더 일찍 왔으니까 내가 하지, 그게 합리적이지’ 하며 도맡아 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겐 당연한 게 됐구나, 내가 발언하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싶어요. 요즘 젊은 여성분들이 여러 계기로 목소리를 내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게 저는 대단해 보이고, 힘을 많이 받고 그렇습니다.


   ⑶북 디자인의 매력은? 

오새날: 책에 대한 질문을 좀 더 하고 싶은데요. 북 디자인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김소미: 어떻게 보면 부질없는 질문일 수 있는데 사전 질문을 받으면 꼭 나와요.(웃음) 어떻게 북 디자인을 시작했고, 오랫동안 해오고 계신지, 원동력 같은 것도 궁금합니다.

오새날: 그리고 작업하신 책 중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걸 소개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정은경: 보통 시각디자인과를 나오거나 학원을 다녔거나 하던데, 제 경우는 이 일이 저한테 왔어요. 일이 걸어왔어요. 제가 철학을 전공했는데 대학원을 1년 다니고 어떤 깨달음이 있어서 뛰쳐나왔거든요. 자취를 했기 때문에 생계를 꾸리기 위한 일을 하고 있는데, 저를 잘 아는 지인이 북 디자인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아는 사람이 주니어를 뽑는다는 말을 했어요. 전공자가 아니어도 책 좋아하고 미술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을 찾는데 제가 잘 할 것 같다고요. 딱히 다른 무엇을 꿈꾸고 있는 것도 아니고 공황기 같은 상태였기 때문에 해보기로 했고, 그렇게 북 디자인에 발을 들인 이후로 한 번도 내 일이 아니라고 의심한 적 없이 쭉 일했어요. 다른 일을 안 하고 계속 이걸 하는 이유는 그냥 하다 보니까, 걷다 보니까 계속 걷는 그런 것 같아요.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은, 딱 떠오를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냥 최근 작업 중에서 골랐어요. «타샤의 정원»(윌북, 2017) 리커버 특별판이 재밌었는데, 예쁘게 해도 되는 책이어서 맘껏 예쁘게 해본 책이었어요. 사람들이 «나쁜 페미니스트» 디자인을 보고 페미니스트 책인데 예쁘게 만들면 되느냐는 말을 하는데, 그 예쁘다는 게 ‘프리티’라는 의미라면 저는 그 표지가 프리티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예쁘다기보다 엘레강스한 책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그리고 제가 하는 디자인의 대부분이 제 생각에 프리티한 쪽은 아니거든요. «타샤의 정원»은 개중 그래도 프리티한(웃음) 것이어서 골라봤고요. 또 하나는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다산책방, 2012) 예스24 특별판이에요. 오랜만에 만난 좋은 소설이었고, 또 특별판이라서 맘껏 할 수 있었어요. 조금 고급스러운 종이를 쓰고, 제가 일러스트 작업도 할 수 있어서 좋았고요. 세 번째는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어크로스, 2017)인데, 제목이 너무 귀여운 거예요. 타이포 작업을 재밌게 했던 책이라 골라봤습니다.

최정은: 제 경우 북 디자인을 하겠다고 고집한 적은 없어요. 앞에서 철학 전공을 하셨다고 해서 반가운데, 저도 많은 길을 돌고 돌아서 디자인 공부를 다시 하고 이미 나이를 많이 먹은 채로 디자인 업계에 들어왔어요. 처음에 브랜딩 디자인 회사를 1년 조금 넘게 다녔는데, 다른 공부를 했던 5년여의 시간을 버리고 온 이 업계가 좀 실망스럽더라고요. 고민 끝에 퇴사한 뒤 ‘디자인을 계속 해야 되나?’ 이런 생각도 했죠. 당시 같이 졸업한 친구가 민음사에 다녔는데, 그 친구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일하는 환경이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실망한 포인트와 다를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 조금 보였고요. 그러고 나서 무작정 파주 출판단지에 가서 ‘내가 북 디자인을 해도 될까’ 생각하며 돌아다녔어요. 가만히 생각하니까 저는 책을 많이 읽었던 건 아닌데 책이 있는 공간과 그 분위기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20대 때 할 일 없으면 가는 곳이 서점이었어요.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기회가 닿아 민음사에 들어가게 됐고요.

북디자인의 매력을 생각해보면, 계속해서 다른 텍스트를 만나는 것, 노력하지 않아도 여러 가지 생각을 만나게 되는 것? 그리고 그 내용에 맞게 책이 잘 나왔을 때 만족감이 큰 작업인 것 같아요. 제가 작업한 책 중에서 아끼는 건, 아무도 모르실 것 같은데 물과 관련된 인류 문명사를 다루는 «물의 세계사»(민음사, 2013)예요. 내용의 스케일이 너무 커서 어떤 디자인을 해도 왜소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고생을 많이 했어요. 작업하면서 많이 팔리진 않겠지만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책이겠다 싶었어요. 저와 누군가에게만 의미 있을 거라는 느낌이 좋아요.(웃음) 책의 매력 중 하나가 사실 평면인 듯하지만 평면이 아니라는 거잖아요. 디자인적으로 이 책은 평면이 아닌 것으로서 책의 모든 면을 이용해볼 수 있어서 기억에 남아요. 여러분이 좀 아실 만한 책으로는, 동네서점 에디션으로 «인간실격»과 «무진기행»을 작업했는데,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타이틀들이었어요. 처음 맡았을 때 ‘잘할 수 있을까’ ‘해보고 싶다’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고, ‘좋아하는 책은 함부로 맡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애정에 비해 작업하면서 스스로가 실망스러워 어렵게 끝냈던 기억이 나고요. 북 디자인을 하면서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책도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해왔는데, 특별판이어서 이제 절판됐지만 «인간실격»을 제 손으로 프린트 해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김다희: 저는 미술을 늦게 시작해서 상대적으로 짧은 미술 입시 준비 기간을 거치고 대학에 들어가고 보니까 많은 경험을 하고 싶다는 갈증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르바이트나 인턴 생활을 다양하게 했고, 글꼴 연구회나 동아리에서 한글꼴을 만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폰트 만드는 일은 할 수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잘할 만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것보다는 글자라는 재료를 가지고 편집 디자인을 하거나 페이퍼 작업하는 게 훨씬 재밌었어요. 기회가 닿아서 디자인 회사에서 인턴을 했는데,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야근을 많이 했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이렇게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불사해야 되는지, 그러니까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일해야 되는지 싶더라고요. 그리고 결혼이나 출산을 언젠가는 당연히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디자인 에이전시에 몸담고 있으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대기업에 가면 소위 ‘정시 퇴근’이 가능할 테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닐 거고.

4학년 졸업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그런 고민을 치열하게 했어요. 그맘 때 지금 회사 미술부에 다니는 학교 선배들이 있었는데,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정시 퇴근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지원해보라고 조언하는 거예요. 이미 여러 일을 경험했고 어떤 게 나한테 나은 길인지 판단이 서는 상태였기 때문에 곧장 지원했어요. 다행히 입사하게 됐고요. 입사 첫날이 기억나요. 첫 출근이니까 회식을 하거나 야근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딱 6시가 되니까 미술부 부장님이 퇴근하시는 거예요.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이렇게 일하면서도 저녁 시간을 갖는 게 가능하구나. 선배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줬고요.

북 디자인의 매력이라면, 화면으로 거친 원고를 읽는 스릴감을 뽑고 싶어요. 아직 아무도 안 봤고, 편집자랑 디자이너가 처음 보는 사람이잖아요. 원고가 재밌으면 조판을 해놓고 인디자인 화면에서 끝까지 읽을 때도 있어요. 그리고 날것의 텍스트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보여줄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이 어렵지만 재밌고요. 또 책은 어느 서점에서도 볼 수 있잖아요. 강릉, 전주에 있는 서점에서도 작업물을 볼 수 있는 것도 매력으로 다가왔고요. 요즘에는 SNS로 피드백을 금방 받다 보니 거기서 보람을 느낄 때도 있고. 간혹 디자인이 별로라는 후기를 볼 때도 있지만요.

인하우스 디자이너는 많은 책들과 곁가지 친 업무를 소화하기에 들쳐보기 싫은 작업도 많고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해야 되는 책들도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던 작업은 백두리 작가와 함께했던 «파운데이션» 전집(황금가지, 2013)이 있어요. 총 7권이었고, 1년 넘게 진행했어요. 시간도 에너지도 정말 많이 쏟았어요. 기존 SF 책들이 촌스러운 총천연색을 많이 썼던 것과 달리 색은 자제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자고 결심했지요. 백두리 작가님의 원래 그림 스타일과도 다른 지점으로 서로 끌어내고 쌓아 가는 과정 자체도 재밌었고요. 후가공에서 박을 여러 가지로 쓴 것도 좋은 경험이 됐습니다.

우유니게: 저는 시각 디자인을 전공했는데요. 사실 북 디자인을 하게 될 줄 몰랐어요. 글자를 다루는 일이니까 굉장히 섬세하고 꼼꼼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지레 겁먹고 기피했거든요. 그래서 좀 볼드한 그래픽 위주로 포스터나 브랜딩 같은 데 관심을 더 가졌죠. 회사에서는 기업 브로셔나 교재 표지 디자인 작업 등을 하다가 단행본은 처음으로 디자인한 거예요. 재미있더라고요. 직접 해보니까 저랑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덜렁대는 성격이라서 실수도 많이 하지만, 고쳐 가면서 열심히 하려고요.

대부분의 북 디자이너분들이 말씀하시다시피 평면적이고 입체적인 느낌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느껴졌어요. 그리고 좋은 텍스트를 다룬다는 점. 기업에서 발행하는 애뉴얼 리포트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영혼 없이 작업할 것 같은데, 편집자에게 받은 원고를 읽으면 내용이 너무 좋고. 물론 조판하기 전에 워드 프로세서로 읽기 때문에 눈에서 피가 나긴 하지만, 다 읽고 나면 막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앞서 말씀하셨듯이 좋은 원고를 먼저 본다는 즐거움과 짜릿함이 있어요. 내용이 좋은 날것의 텍스트를 사람들이 보기 좋게 만들어주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만들었을 때 단단한 물성으로 손에 잡히는 느낌도 좋고, 서점에서 마주치는 것도 좋고, 다른 누군가의 책장을 차지한다는 것도 좋고, 누가 들고 있는 걸 볼 때의 기분도 정말 좋고. 두 번째로 낸 책이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봄알람, 2016)인데, 작업하면서 기록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러니까 글을 쓴다는 것은 기록을 한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여성들의 이야기는 기록이 많이 안 이뤄져 있는 거예요. 여성의 이야기, 여성의 목소리, 여성의 일, 그리고 여성의 싸움을 기록하고 박제하고 복제하고 전파하는 과정이 중요하고 소중한데. 그래서 책이라는 게 굉장히 소중하구나 다시금 느끼게 됐어요.

오새날: 정말 다양한 얘기를 들었네요. 북 디자인을 시작한 계기들도 흥미롭고요. 바로 옆에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⑷디자인 작업의 범위는? 협업에 임하는 태도는? 

오새날: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고요. 사전 질문을 드리고 답을 들었는데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서 공유하고 싶어요. ‘북 디자인 작업에서 저자나 편집자가 관여하는 범위는 어디까지가 좋을까?’ 그리고 일을 하다 보면 디자인만 하진 않잖아요. 편집 일을 하는 경우도 있고, 최근 굿즈를 많이 만드는 경향을 생각해볼 수 있고요. ‘북 디자인을 하면서 편집, 제작, 기획, 마케팅 등 다른 분야와 어떻게 협업하면 좋을까?’ 두 가지 질문 중 하나를 골라 답변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물론 다 얘기하셔도 좋고요.

정은경: 일단 편집자가 관여하는 정도를 표현하기 애매한데요. 저는 경험적으로 상세한 발주서가 있다면 그 밖의 다른 의견은 크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발주서를 제대로 만든다는 건 결정해야 될 사항을 다 결정했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걸 보고도 생기는 의문을 디자이너가 질문하며 해결하는 방식이 소통의 오류가 적은 것 같아요. 가장 난감한 경우가 표지에 특정한 사물을 넣으면 어떻겠냐고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클라이언트라서 ‘저걸 정말 원하나?’라는 생각을 초장부터 하게 되면, 때로는 거기에 갇히는 상황이 생기거든요. 또 막상 보여주면 그게 아니라고 할 때도 있고요. 물론 저처럼 오래 일한 경우는 이런 당황스런 상황이 거의 없지만, 아직 어린 디자이너들에게는 종종 일어나요. 그래서 기회가 되면 저는 편집자들한테 얘기하고 싶어요. 편집자가 원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읽지만, 그렇게 해서 다 잘할 수 있으면 디자이너가 왜 필요하겠어요. 활자 언어를 시각 언어로 구현해내는 것이 디자이너의 전문성이고, 편집의 영역과 텍스트를 이미지화하는 영역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작용이라는 걸 이해하고 존중해줬으면 해요.

대형 출판사는 마케터, 편집자가 전부 모여 기획 회의를 여러 번 거친 후 디자인 발주를 내기 때문에 상당히 정리된 상태로 오지만, 그 밖의 경우는 확실한 방향이 나오지 않은 상태로 들어올 때가 많아요. 그걸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는 게 사실 디자이너의 능력이죠. 그 능력의 핵심은 ‘질문하기’에 있는데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낼 때까지 질문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사실 내가 고생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해요. 우리 디자이너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헛일 아니에요? 클라이언트가 제시한 것들 사이에 모순은 없는지 짚어가며 질문하고, 그렇게 방향을 좁힌 후 작업에 들어가야 에너지를 제대로 모아 쓸 수 있어요. 재시안을 반복하는 건 소모적이잖아요. 완전히 다른 2개의 시안에 베리에이션 1개 정도로 이끌고, 거기서 끝날 수 있게 제대로 된 걸 만들어내야 해요. 신뢰를 쌓으면서. 그러려면 디자이너가 역량이 있어야 되고요.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가 제시하는 요구들 간의 모순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어요. 우리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올려볼 때, 이걸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잖아요. 그걸 사전에 질문해서 버리고 좁히도록 하는 거죠.

그 질문 방식은 주로 마케팅이랑 연결되는 것 같아요. 결국 누구한테 팔 책이고, 읽을 사람이 몇 살이고, 어느 매대에 놓일 거고, 어떤 책들과 경쟁할 것인지 정해져야 표지가 나오는데, 그것도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발주를 낼 때가 많죠. 시간에 쫒겨 밀어내듯 책을 만들어야 하는 게 출판사가 처한 현실이니까요. 그러다 보니, 다른 분야에 관여하는 걸 말씀하셨는데, 관여할 수밖에 없어요. 하나하나 질문하다보면 뭔가 덜어내는 경우도 있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고 오겠다는 경우도 있어요. 최근 작업한 책을 예로 들면, 카피가 엄청 많은 자기계발서였는데, 표지는 엘레강스하게 나오길 바라는 상태였어요. 도저히 상충되지 않는 것들이 같이 들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생각해보겠다고 하시고는 제목부터 몽땅 손질된 발주서를 보내셔서 일사천리로 작업할 수 있었어요.

최정은: 저는 두 번째 질문에 답을 드릴게요. 협업은 작업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를 것 같아요. 다른 출판사를 다녀보지 못해서 정답은 아닐 것 같은데, 저희가 기획에 참여하게 되는 경우는 대체로 최근 들어 많아진 굿즈 관련한 일, 홍보물에 관한 일이고요. 마케팅부에서 많은 부분 정해서 디자인 의뢰로 내려오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편집부에서 기획되어 내려올 때도 있고, 같이 모여서 할 때도 있어요. 대체로 어떤 굿즈를 만드는 게 디자인적으로 더 효과적일지 정하는 일, 한정된 예산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디자인 방향을 정하는 일, 표지 이미지를 이용해 2차 저작물 제작 시 저작권 관련 문제에 의견을 내는 일 등을 합니다. 홍보물 관련해서는 최근 추세라서 사실 부서 간의 경계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어요. 다른 출판사는 어떻게 진행하는지 궁금하네요. 어떻게 보면 마케팅 일인데, 어쨌든 저희가 만들기 때문에 디자인 일이기도 하고, 내용을 빼고 갈 수 없으니까 편집부도 포함돼 있고.

김다희: 저처럼 인하우스 디자이너의 경우, 편집자와 긴밀하게 자주 보는 사이긴 하지만 각자 일하는 방식이나 성격에 따라 책 진행 방식이 달라질 때가 많아요. 기본적으로 자기 책에 대한 애정이 덜 하거나 어떻게 되든 큰 상관없는 편집자보다는 책에 대한 애정이 넘치더라도 이런저런 의견을 내는 편집자가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고요. 사전 회의도 하고 평소에 점심 먹으면서 좋은 게 있으면 함께 나누고 서점에 같이 가기도 하면서 아이디어를 많이 나눠요. 제 경우 디자인이 구체화되면 최종 시안을 딱 보여주기 전에, 정은경 님이 말씀하신 대로 헛일하지 않기 위해 담당 편집자와 중간 단계를 갖는다든지, 포인트를 정해놓고 달려가는 식으로 작업을 해요. 항상 대여섯 권 정도의 책을 저글링 하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죠. 그리고 출판사에 소속된 디자이너다 보니까 컨펌 단계를 거칠 때, 예를 들면 마케팅부나 편집부 담당자들이 모여 시안을 보고 결정할 때 제가 직접 들고 가서 디자인에 대해 얘기를 하죠. 이런 근거를 통해서 내가 이렇게 디자인을 했는데 이게 가장 좋은 것 같다. 사장님 방에 들어가서 최종 컨펌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디자이너도 그런 연습을 해야 할 필요를 많이 느끼고요. 내 작업에 대해서 남들을 충분히 설득시킬 수 있는 능력. 물론 딱 봐서 좋은 게 누가 봐도 좋은 디자인이긴 하지만.

각 부서가 모여서 매주 일정 회의를 해요. 일정이나 마케팅 포인트나 기획 의도 같은 것을 얘기하는데, 앞서 말씀하셨듯이 디자인 업무의 범위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카피나 홍보 전략에 대해 조언도 하고 의견을 많이 나누는 편이에요. 아울러 두 번째 질문과 연관이 되는데, 물론 북 디자이너들이 전통적인 종이책 업무에 힘을 싣고 또 하고 싶어 하지만 전자책 시장이 많이 커지고 있거든요. 유저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회사 내에서 온라인 소설 플랫폼도 만든 상황인데, 그런 흐름에 대해서 디자이너가 유연하게 바뀐다거나 공부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표1(책 표지)만 보일 때 독자에게 얼마나 어필이 되는지, 종이책과 같은 제목과 디자인으로 전자책을 낼 건지, 아니면 바꾸는 게 좋을지, 이런 부분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고. 그걸 스트레스로 생각하면 힘이 드니까 긍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편이에요. 늘어난 굿즈 업무라든지 SNS 업무도 디자이너가 통일성 있게 가져간다는 생각으로 임하면 재밌게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김소미: 우유니게 님의 경우 출판사라기보다는 팀에 가까운 부분이 있으니까 다른 각도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있을 것 같아요. 또 봄알람 멤버가 전부 여성이고 나이가 많지 않은 편인데, 그렇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도 있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힘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은데요.

우유니게: 네, 많은 얘기를 해주신 것 같은데.(웃음) 저희는 대형 출판사도 아니고 굉장히 소규모 독립출판사도 아니고 약간 특별한 형태인 것 같아요. 4명이서 긴밀하게 대화를 많이 해요. 책을 만들 때도 기획 단계부터 굉장히 많은 얘기를 나누고요. 그래서 합의 수준이 굉장히 높은 편이고, 그 과정에 큰 어려움은 없어요. 봄알람을 하면서 느꼈던 점은 누군가 내 디자인에 관여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것. 어떤 말을 하는지가 중요한데, 봄알람 안에서 주고받는 피드백들은 질이 높다고 생각해서 그 관여 자체가 좋은 거예요. 좀 더 좋은 결과물을 내는 방향으로 서로에게 얘기를 해주며 굴러가고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가 제 디자인에 대해 피드백을 줬을 때 그 근거를 물어보고 그에 동의하면 반영하기도 하고, 제가 동의하지 못하면 그 이유를 설명하고 반영하지 않아요. 의견은 자유롭게 교환하지만 최종 결정은 그 담당자에게 맡기고 있어요. 저도 디자인 담당이지만 때로는 마케팅 이벤트에 대해서 아이디어를 내기도 하고요. 서로의 역할에 대해서 전문성을 존중해주면서 그때그때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고 예의를 지키니까 문제가 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외부적으로는 인쇄소에서 외모 품평을 듣는다든지 어린 여성이 으레 받는 대우와 경험을 똑같이 겪고 있어요. 얼마 전엔 봄알람으로 다 같이 인터뷰를 하는데, 다른 지면에는 남자들만 나와서 칙칙하니까 여자인 너네가 좀 웃으라는 말을 들었던 적도 있고. 회사를 여기저기 돌아다녔을 때도 다른 남자들한테 직접적으로 외모 품평을 받거나 성희롱적인 얘기를 듣거나 성적대상화가 되거나 이런 일이 생각보다 많았는데, 지금은 여성들끼리 일을 하니까 그런 게 없어서 너무 좋고요. 편안하게 일할 수 있고, 그러면서 또 다른 여성들과도 많이 연결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도움을 ‘준다’기보다는 여성끼리 서로 돕는다, 서로 연계가 된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네요. 사진이나 일러스트가 필요한 경우가 있잖아요. 그럴 때를 대비해서 여성 포토그래퍼나 여성 일러스트레이터를 눈여겨보고 있고, 또 어떤 일이 들어왔을 때 내가 여력이 안 될 경우 다른 여성 디자이너한테 토스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프리랜서 디자이너로서 저한테 의뢰를 주시는 분들이 대부분 여성이고, 제가 페미니즘 출판사를 하다 보니까 여성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들, 여성 관련된 단체를 하시는 분들이 많이 연락을 주세요.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 같아서 되게 좋아요.


   ⑸출판계 내 여성 디자이너의 업무 환경은? 

오새날: 이야기를 이어볼게요. 출판계는 여성 비율이 굉장히 높은 편이잖아요. 사장님, 실장님, 과장님, 이사님, 전무님까지 다 여성분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성 비율이 높은 곳인데, 여성 북 디자이너로 활동하기도 좋은 편이라고 느끼시는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떤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쇄소 등지에서나 일상적으로 겪는 여성혐오적 피해도 있긴 하지만, 출판계 자체가 여성 디자이너로서 일하기 좋은 환경인지 여쭤보고 싶어요.

정은경: 저는 질문 주신 분들께 먼저 여쭤보고 싶어요. 이런 질문이 나온 데는 그에 관한 경험치나 생각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고 계신지, 출판사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분이 얘기해주시면 어떨까요?

오새날: 저는 마티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데, 최근에 책 모양새가 너무 안 좋게 나온 적이 있어요. 2천 권이 다 교정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수준이 말도 안 됐어요. 그래서 그걸 다 들고 창고에 가서 하나하나 검수를 하고 인쇄소 직원분께 따졌더니 굉장히 무례하게 나오는 거예요. 저희 사장님이 여자분이신데, 사장님인 줄 모르고 막말을 하다가 사장님이라니까 ‘진작 말씀하셨어야지’ 이런다든지. 회사 구성원이 다 여자라서 그런 경험이 없었는데 그때 깜짝 놀랐어요. 다들 이러고 사는구나 싶어서. 제작사, 종이 회사, 인쇄소의 경우 남성이 훨씬 많거든요. 그런 데서 부딪히는 것들이 피부에 와닿는 경험인 것 같아요.

김소미: 저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어요. 아까 다희 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쪽은 야근을 굉장히 당연시하는 분위기예요. 제가 다니는 회사는 야근이 거의 없는데, 제 친구들은 그런 얘기를 해요. 퇴근 시간 이후에 일하면 야근인데, 자기들은 밥을 먹어야 야근이라고 한대요. 8시에 퇴근해도 밥을 안 먹었으면 야근이 아니고. 또, 막차 끊기기 전에 일이 끝나면 칼야근이라고 해요. 야근다운 야근이라고 해야 하나? 야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야근은 보통 철야라고 하는, 집에 가서 씻고 다시 출근하는 그런 것이고. 진짜 바쁠 때는 아예 집에 안 가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죠.

다른 친구는 어떤 회사에서 연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는데, 갔다가 집에 쭉 못 들어갔대요. 아예 거기서 한 달을 산 거죠. 이게 뭐지 싶었는데, 직원이고 뭐고 그런 식으로 일하는 게 되게 일상적이었다는 거예요. 그런 삶이 가능한 이유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거기서 일하는 간부급 인사가 대부분 육아나 가사 노동을 배우자에게 맡기는, 본인은 집안일에 별로 신경을 안 써도 되는 남자들이기 때문인 거예요.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집에 대신 살림을 하는 누군가가 있거나. 집에 가서 보살펴야 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그 패턴이 가능하지 않은 거죠. 그러니까 그래픽 디자인계는 아주 젊은 여자 직원이 몇 년 있다가 결혼하면 사라지는 구조가 반복돼요. 남자 직원은 결혼하면 가사를 배우자에게 맡기고 하던 대로 일하기 때문에 위로 갈수록 남자만 남는 거죠. 저는 출판계가 늘 신기하게 느껴지는 게, 결혼을 해도 단절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착시인가? 앞서 말한 회사를 다니던 어떤 분이 출산 휴가를 썼는데, 그게 창립 이래 최초였대요. 그 전까지는 퇴사했다가 재입사하거나 퇴사하고 돌아오지 않거나 했다는데. 경우가 많이 다르겠구나 싶네요.

김다희: 구구절절 참 와 닿아요. 한때 경험했던 거라서. 근데 그걸 겪으며 가장 괴로웠던 건 정시 퇴근을 하거나 결혼과 출산에 대해 생각하는 내 자신이 치열한 디자이너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정시 퇴근을 하는 회사에 근무한 지 11년 가까이 되는데, 다녀 보니까 업무의 집중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야근을 한다고 더 좋은 디자인이 나오는 게 아니고, 근무 시간 안에 딱 집중해서 디자인하면 되는 거거든요. 그런 걸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돼야 하고,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처음 회사 다닐 때 학교 선배나 디자인 에이전시 다니는 분들에게 많이 들었던 얘기가 ‘너는 놀면서 다닌다’ 이런 비아냥인데, 절대 그렇지 않고요. 아까 얘기한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한두 해 견딜 순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런 근무 환경에서는 디자인 일을 오래 지속할 수가 없어요. 여자고 남자고 다 똑같은 것 같아요.

출판사가 여성이 다니기 좋은 직장이라는 말은 아마 정시 퇴근이 가능하다는 것과 여자들이 많이 다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연차를 자유롭게 쓴다든지, 아이 때문에 자리를 비웠을 때 이해해주는 연대 의식 같은 게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회사도 육아 휴직을 쓰는 분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첫째를 낳고서는 출산 휴가 3개월만 쓰고 복귀했어요. 육아 휴직을 쓰면 1년 정도 자리를 비우게 되는데, 미술부가 여럿이라고 해도 내 일을 대신해줄 사람이 없는 거죠. 1년 공백이 갑자기 생겨버리면 다른 팀원이 그만큼 피해를 입고, 편집자들 일정도 다 흔들려버리니까 육아 휴직을 쓰는 분이 없던 거예요. 그래서 첫째를 낳고 둘째를 낳기까지 텀이 길었어요. 여러 가지 고민이 있었지만 ‘내가 일을 그만둬도 둘째를 낳아야겠다’는 결심이 설 때까지 기다렸는데, 그땐 복직을 못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애가 하나일 때와 둘일 때는 상황이 정말 다르다고 느꼈고 현실적으로도 그랬죠.

그런데 제가 팀장이기 때문에 육아 휴직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밑에 후배들 고생하는 거 너무 뻔히 보이고, 책임감도 많이 느껴지고요. 그래서 둘째 때는 3개월 출산 휴가에 3개월 육아 휴직을 붙이고 복직했는데, 육아 휴직이라는 제도 안에 육아기 단축 근무라는 제도가 있더라고요. 4시에 퇴근하겠다고 하면, 그러니까 2시간 단축 근무를 하겠다고 하면 월급의 2시간치를 깎는 거죠. 그러면 정부에서 깎인 월급의 절반 정도를 지원해줘요. 저한테 절실하게 필요한 제도였고 회사 입장에서도 괜찮은 제도라고 생각돼서 사장님께 말씀드리고 처음 쓰게 됐는데, 다른 여성 동료분들께 많이 추천을 드렸어요. 물론 4시에 딱 일을 종료해야 해서 힘들었지만, 단절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것이어서 의미가 컸고요. 지금은 다른 걸 떠나서 이렇게 일을 오래 지속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어떤 위안이 되는 상황인데, 그게 또 버티는 힘이 되기도 하고요.

오새날: 다희 님이 시작하면서 후배 디자이너도 함께 시작하는 계기가 되는 일인 것 같아요.

김다희: 제가 써보니까 이런 정책도 많이 개선돼야 한다고 느꼈어요. 육아 휴직이 1년인데, 육아기 단축 근무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사용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한 아이당 2년 혹은 3년이어야 해요. 그런데 육아 휴직과 동일하게 한 아이당 1년으로 제한돼 있거든요.

오새날: 다른 분 혹시 의견 있으신가요?

정은경: 저는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요. 아까 어떤 회사에서 창립 이래 처음으로 육아 휴직을 썼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생각해보게 돼요. 젊은 친구들의 힘이었던 것 같아요. 작년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을 계기로 목소리를 냈잖아요. 댓글 달기가 됐든 해시태그 달기가 됐든 그런 물결이 있었기 때문에, 그 위 세대가 덮어뒀던 것들에 대해서 분노하고 목소리를 내줬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위 세대가 거꾸로 혜택을 입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면이 분명히 있는 것 같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목소리를 내는 건 불이익을 감수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지만 사적인 영역에 가서는 돌변하는 사장님들도 많고. 그게 현실이에요. 민음사와 문학과지성사는 정말 손에 꼽히는 좋은 환경이고요. 제가 출산하고도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문학과지성사에 다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정시 퇴근을 했고 야근을 안 한다고 눈치 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육아를 하면서 다닐 수 있었던 거라서요.

처음 시작할 때 디자인 사무실에 근무했는데, 평균 퇴근 시간이 새벽 한두 시 정도였어요. 저는 어떻게 보면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하는 거지’ ‘야근하는 게 본인한테도 도움이 될 텐데’ 이렇게 생각하던 세대인데, 요즘 친구들 보면서 다르다고 느껴요. 야근은 부당한 것이고, 내 권한을 빼앗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친구들이 많다는 걸 알았어요. 사실 너무 당연한 거잖아요. 보장된 권리인 것이고. 그래서 다같이 연대해서 쟁취해야 하는 것 같아요. 지금 사회 분위기가 이런데 야근시키고 휴가 못 쓰게 하면 된서리 맞을 수 있다는 압력을 회사가 받도록 해야죠. 사장이 갑자기 생각을 바꾸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점에서 젊은 친구들한테 참 고마워요. 그 힘을 받아서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딱히 뭘 하는 건 없어서 미안하고요.(웃음)


   ⑹최근 페미니즘 콘텐츠의 경향은? 

김소미: ‘요즘 분위기’라는 말이 나온 김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볼게요. 페미니즘 책이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작년 5월쯤 디자이너 오진경 님과 잠깐 얘기를 나눴어요. 말씀하시기를 4/4분기 출간 목록을 잠깐 훑어보니까 죄다 페미니즘 책이더라고. 진짜 대세는 대세구나 싶고, 또 어떻게 보면 알맹이는 없는 것 같고, 그냥 이때다 싶어 몰려드는 책도 있는 것 같고, 아직 잘 모르겠다고 하셨거든요. 이래나 저래나 페미니즘이 출판계에서 큰 화두인 건 분명한데요. 페미니즘 콘텐츠를 책으로 만든 디자이너로서 이런 흐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최정은: 사실 저는 «엄마는 페미니스트»가 팔리는 걸 보면서 무섭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어요. 그렇다고 대단히 많이 팔린 건 아니에요.(웃음) 초반 판매 속도를 보고 뭐랄까 좀 달려든다는 느낌? 아까 말씀하셨듯이 핫한 주제이기 때문에 혹시 페미니즘을 읽고 공유하는 것 자체가 자기를 포장하는 무언가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염려되는 부분이 있었고요. 물론 젊은 여러분들이 저희 때보다 훨씬 목소리를 많이 내고 페미니즘 이슈에 성숙하게 잘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책 제목을 정할 때의 고민들처럼 ‘엄마’ ‘육아’ 그리고 ‘선언’ 사이에서… 페미니즘이 세련된 어떤 것으로만 포장되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에도 좀 더 접근하면 좋겠어요.

오새날: 말씀하신 게 현실적인 부분인 것 같아요. 선언도 좋지만 세상에 엄마들이 얼마나 많아요. «엄마는 페미니스트»처럼 엄마를 위한 페미니즘 책이 필요하고요. 그래서 미혼인, 결혼할지 모르겠는 저마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도움을 많이 얻은 것 같아요.

김소미: 다른 책보다 훨씬 더 유쾌해서 좋았어요. 마지막 문장이 “이 긴 글을 다 읽고 나니 머리가 아프니? 미안. 다음번에 네 딸을 페미니스트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나한테 묻지마.” 이걸 보고서 이런 페미니즘 책도 있고 저런 페미니즘 책도 있어야 되는구나 느꼈어요.

오새날: 역자분이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그런 말투로 번역했다는 게.

우유니게: 책도 책인데 페미니즘 콘텐츠 자체가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저는 그 자체로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요. 다만 예전에 페미니즘 문화가 활발했다가 사그라들었듯이 지금 이 붐도 그렇게 사라질까 봐 겁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많은 여성들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에 막상 그렇진 않을 것 같아요. 접근하기 쉬운 대중서도 많이 나오고 있고, 그만큼 독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 같고요. 봄알람을 시작할 때 여성 중에서도 페미니스트 독자층으로 한정돼 있으니까 생존 자체를 걱정했거든요. 안 팔릴 때도 됐는데, 읽을 사람 다 읽지 않았나 싶어도 계속 나가더라고요.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도 문학 작품이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은 것 같고,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가지고 다양한 형태와 색채를 가진 페미니즘 콘텐츠가 많이 나와주면 좋겠고 그러길 기대하고 있어요.

오새날: 2016년 기점으로 깨달음을 얻은 젊은 세대들을 3세대 페미니스트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말하자면 2세대인 저희 사장님 같은 경우에는 ‘자존심 상해서 오빠라고 안 부르고 형이라고 불렀어’ 하시거든요. 그 세대가 지나고 다시 3세대까지 왔지만, 언젠가는 이와 같은 흐름이 거품이라고 할 것도 없이 인식이 아예 변해서 모든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82년생 김지영»처럼 모두가 접하기 쉬운 페미니즘 콘텐츠가 유행해도 좋겠고요.

김다희: 출판사란 곳이 소위 안 팔리는 책, 의식과 철학을 가진 책을 내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영리 추구가 목적인 회사잖아요. 제가 다니는 회사에는 남자분들도 많은데, 요즘은 페미니즘 책만 돈이 되는 것 같다는 말을 해요. 아까 소미 님이 오진경 님과 대화 나눈 걸 얘기하셨는데, 그게 자연스러운 현상인 거예요. 돈이 되기 때문에 그 책들이 계속 나오고, 그렇다 보면 당연히 콘텐츠 질이 떨어지는 책들도 나올 수 있죠. 인하우스 디자이너이다 보니 여러 장르의 책을 디자인하는데, 경제 경영서나 부동산 관련 책도 해요. 알맹이 없는 것도 꽤 있거든요. 책이라고 해서 다 수준이 높은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페미니즘 책이 나오는 어떤 시작점에 있기 때문에 거품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더 나오는 것 같고요. 다양한 책이 나오고 얘기가 되는 건 당분간 계속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은경: 저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해요. 아직 멀었고, 그게 잡담이든 뭐든 훨씬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너무 과격해서 일부 소수만 동의하는 내용도 나와야 하고, 또 외국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페미니즘 책 중에서 아직 번역이 안 된 것도 많고요. 그러니까 정말 누가 그런 얘기를 하면 ‘아직 멀었는데’ 이렇게 한마디로 일축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우유니게: 저도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고 아직 할 게 되게 많다고 생각해요. 기획할 게 정말 수천수만 가지 쌓여 있거든요. 그래서 저희도 이것저것 다 해보려고 노력해요. 거의 한 달에 한 권꼴로 신간을 내고, 내년 상반기까지 계획이 촘촘하게 잡혀 있거든요. 막 바빠가지고 죽을 것 같긴 한데.(웃음) 아무튼 그런 식으로 많은 분들이 더 많은 콘텐츠를 내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소미: 갑작스럽지만 이렇게 된 김에 봄알람 다음 책 좀 소개해주세요.

우유니게: 곧 나올 신간이 «잃어버린 임금을 찾아서»예요. 임금 격차, 유리천장, 이런 것들에 대한 내용이고요. 이민경 님이 쓴 글인데, 원래도 그랬듯이 약간 독특한 관점으로 시작해요. 지금까지 우리가 못 받았던, 잃어버린 임금을 합치면 도대체 얼마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거든요. 진로 선택, 취업, 승진, 고과, 그런 커리어를 단계별로 쪼개 사례를 들면서 파헤치는 책인데, 보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어요.


   ⑺삼십 대 이후 여성 디자이너의 삶, 롤모델은? 

김소미: 이제 마지막 질문으로 넘어가서 약간 미래 지향적인 애기를 해볼게요. 행사 때마다 나오는 질문 겸 푸념 겸 한탄인데, 여성 디자이너들이 소위 롤모델 없다는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매체에서 다뤄지는 여성 디자이너가 너무 적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본인 미래를 생각할 때 뭘 하고 있을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는 막막함의 표현이기도 해요. 삼십 대 이후 여성 디자이너의 삶이란 주제로 하고 싶은 얘기를 한마디씩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새날: 비장한 질문이야.

최정은: 제일 어려운 질문이에요. 저는 올해로 서른아홉이고요. 사회생활을 늦게 시작해서 모든 게 밀렸어요. 한 5년씩 밀린 채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보다 대부분 나이가 많은 그런 상태로 지내왔는데, 30대 넘어가면서 부터 그게 너무 억울한 거예요. 나는 그냥 내 속도로 살아왔는데, 항상 나이 많다는 생각으로 살면서 포기한 게 얼마나 많았을까. 이제 마흔을 앞두고 또 그 생각을 하는 거죠. 여러분들이 마흔을 생각할 때 되게 많은 나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닥쳐보면 정말 마음이 똑같거든요. 일례로 제가 이십 대 초반에 스물여덟 살 언니가 니삭스를 신은 걸 보고 경악을 한 적이 있어요. 스물여덟 살인데 니삭스를 신네.(웃음)

제가 스물여덟 살이 되고 그 일이 떠오르면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구나, 너무 부끄러웠어요. 나이 문제는 너무나 상대적이라는 이야기를 일단 하고 싶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인 얘기를 막 늘어놓고 싶진 않아요. 직업이랑 연결하면 그게 니삭스의 문제는 아니니까. 나이를 먹어가면서 디자인 역량에 대한 고민을 하게 돼요. 어느 순간 작업이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하게 되는 시점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 순간을 조금이나마 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죠. 길게 보면 당장 내 분야만 잘하는 디자이너보다 디자인적 감수성 내지는 관점이 튼튼한 디자이너가 되려고 노력하면 어떨까. 나이에 맞게 분야가 바뀌어도 유연하게 디자인적인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또 하나는 야근, 육아, 결혼 이런 주제와 연관된 건데, 각자 놓인 상황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열심히 치열하게 찾는 것. 사실 이 문제는 외부적인 요인이 너무 많아요. 디자인적 관점을 훈련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고요. 깊게 들어가면 국가 정책의 문제까지 가 닿기 때문에 너무 어려워요. 삼십 대 이후에 결혼을 꼭 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 시기에 걸쳐 결혼, 출산, 육아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변에 육아를 하면서 일하는 여성 디자이너들을 보면 각자 맞닥뜨린 구체적인 상황들은 제각각이지만, 가장 흔한 케이스가 내 커리어를 이어가기 위해 친정 엄마 혹은 시어머니 혹은 또 다른 여성의 희생에 기대는 것. 그렇게라도 이어갈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 속에서 각자 고군분투하고 있어요. 삼십 대 이후 여성 롤모델이 없다고 하는 말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 확률이 확 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긴 시간에 걸쳐 개선해 나가야 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정은경: 진짜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광범위하고 다양한 주제들이 다 함축된 질문 같아요. 사전 질문지에 답을 적기로는 그럼 남자 롤모델은 있느냐고 했는데, 유명하면 롤모델인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여성이 가치 판단을 하는 방식은 훨씬 솔직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정직하고. 뭐랄까, 우상화 작업, 뭔가를 만들어내고 세우고 그런 게 사실 남성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여성은 훨씬 수평적으로 나와 남을 동등하게 놓고 생각하는 편인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그런 여성들이 생각하기에 롤모델 세우기가 그렇게 보기 좋지 않으니까 안 했겠죠. 저는 그런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세계가 너무나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그 법칙에 맞춰져 있다면, 그래서 우리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롤모델이 필요하다면, 정말 가치롭고 존경할 만한 점이 분명히 있는,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그런 롤모델을 발굴하고 세워야겠죠. 봄알람이 어찌 보면 그런 작업을 계속 하실 것 같고요.

제가 40대인데, 육아와 일 문제는 정말 해답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위대한 일이 누군가를 낳아서 생명을 기르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회사를 계속 다녔던 이유 중 하나가 전업으로 육아를 잘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아이한테 화내지 않으면서, 스트레스를 쏟아붓지 않으면서 아이를 기를 수 있다? 저는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 같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던 거고, 그게 아이한테도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같은 생각이에요.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어떤 사람은 선택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 구조는 어떻게든 바꿔야 해요. 그랬을 때야 비로소 집에서 아기를 기르고 집안을 돌보는, 그걸 원하고 그게 더 적성에 맞는 사람도 박탈감을 느끼지 않게 될 거고, 반대로 나가서 일하는 사람들도 아이에 대해 죄책감을 크게 갖지 않을 거고요.

그런 문화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여성들이 빠질 수 있는 맹점이나 오류가 있다면,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해서는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면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은 마치 실패한 것처럼 여기려는 것이죠. 누구나 그런 삐딱한 마음이 발동하곤 해요. 어떤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했는데, 뒤돌아서 생각해보면 내가 어제 한 얘기와 너무 달라요. 우리가 이걸 경계한다면,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여성의 삶에 대해서도 긍정할 수 있다면 훨씬 더 빨리 내가 원하는 걸 선택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엄마는 페미니스트»인가요? 그 책 뒷부분에 나오잖아요. 개똥 같은 대접을 받고 싶지 않은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저는 그게 페미니즘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성소수자나 인권 문제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개똥 같은 대접을 받지 않도록 서로의 삶을 좀 더 지지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다희: 저는 상대적으로 일찍인 스물일곱에 결혼해서 바로 다음 해에 아이를 낳았어요. 올해 서른다섯인데 외롭고 힘든 시기가 많았어요. 스스로가―우아하게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미친듯이 발을 굴리고 있는―백조처럼 느껴졌어요. 디자이너로서의 삶과 육아하는 나로서의 삶이 전혀 다른 인격인 것처럼, 퇴근하는 동시에 다른 나인 것처럼 느껴지고 거기서 오는 괴리감을 극복하는 게 우선의 과제였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보람을 느끼려고 많이 노력했던 것 같고요. 예를 들면, 옛날이지만 홈페이지에 디자인 작업 후기를 소소하게 올리는 것. 그때만 해도 편집자나 역자 후기 같은 건 많았지만 디자이너 후기는 흔치 않아서 많은 분들이 재밌게 봐주셨는데, 그런 것도 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큰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고 나니까 조금 다른 세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업맘과 워킹맘이 대결하는 느낌도 받았고요. 저희 애 같은 경우에는 놀이터에서 혼자 놀 때도 많은데, 그러다 보니 전업으로 육아하는 어머님들이 저희 애를 챙겨주는 상황이 생기기도 해요.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고가는데, 애 손톱을 보면서 ‘엄마가 일하느라 바빠서 손톱을 안 깎아줬나 보다’ 한다든지, 놀다가 친구 물을 먹으니까 ‘애 물 좀 챙겨서 보내라’ 한다든지. 저는 그게 엄청난 스트레스인 거죠. 친정 엄마께서 빈틈없이 살펴주시고 저도 잘 챙기려고 하는데 늘상 구멍이 계속 생기니까. 그래서 제가 큰 애한테 이제 1학년이 됐으니 스스로 먹을 물 정도는 챙겨 다니라고 그랬더니 막 화를 내면서 ‘그러니까 엄마도 다른 엄마들처럼 나 놀이터에서 놀 때 물 가지고 기다리고 간식 먹여주면 되잖아’ 이러는 거예요. 그날 저도 무척 속이 상해서 어떻게 현명하게 말해줄까 고민하다가 저녁 먹고 목욕한 뒤 서로 차분해졌을 때 얘기했어요. 엄마가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물론 집에서 종일 시간을 같이 보내고 노는 것도 의미 있지만, 엄마를 일하는 엄마로서 자랑스러워하고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설명했더니 아까는 잘못 말했다면서 미안하다고 다음날 회사 가라고 얘기하더라고요. ‘책 만들러 가세요’라고.(웃음) 시크하게 얘기해줘서 제가 마음이 편해졌어요.

제가 페미니스트 엄마가 되는 길은, 한편으로 일하지 않는 엄마에 대해서 공격적이거나 비난적인 어조로 말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리고 엄마가 일을 함으로써 아이들이 체험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인 얘기를 해주려고 하고요. 계속 노력하고 있는데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후배들한테 해주고 싶은 얘기는 디자이너로 살아가면서 결혼과 육아을 하는 과정이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니라는 것, 현실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롤모델인지는 정말 모르겠고, 그냥 그런 사람이 있으니까 이게 가능한 일이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지점이 되면 좋겠어요.

우유니게: 저는 이십 대라서 삼십 대, 사십 대 이후 여성 디자이너로서의 삶이 어떨지 궁금해하는 입장이었는데요. 그만큼 고민되고 걱정되고 많이 불안하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여성 디자이너 롤모델은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 자기 길을 잘 닦아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혼자든 조직이든 북 디자이너든 그래픽 디자이너든 여러 분야가 있을 테고, 어떤 사람은 결혼했을 거고, 어떤 사람은 애가 있을 거고. 그런 다양한 삶의 모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너무 막막하잖아요. 누군가가 어떻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지 생각하면 너무 불안해요. 남성들의 경우 결혼 여부나 자녀 유무에 대해서 크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옵션이 확 줄어들어서 선택하기 편할 것 같아요. 육아 휴직을 해야 될지, 출산 휴직이 가능한 회사일지, 야근이 없어서 퇴근하고 애를 봐줄 수 있는 회사일지,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비교적 적잖아요. 그래서 여성으로서 다양한 모델을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어요. 저처럼 자녀 계획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도 많이 궁금하고요. 아직 좀 막막하네요.(웃음) 아무튼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것 자체가 되게 감사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새날: 정말 감사한 말이네요. 저도 다양한 롤모델이란 말에 너무나 격하게 공감을 해버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저희가 준비한 시간은 여기까지고요. 좋은 말씀 들려주신 디자이너 네 분께 박수 부탁드립니다.

김소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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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진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