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파이브

2017.09.01

보광동에 간다


내 이름은 김봇자. 잠이 조금 많은 편. (…) 자기소개는 정말 어렵다.

2017년 7월 7일 늦은 오후. 나는 어느 회의에 초대받아 보광동에 갔다. 우사단로 중턱의 하얀 방.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이 하얀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낯설지 않은 얼굴들로 하나의 일을 함께 모의하기 위해 모인 거라고 했다. “저희 프로젝트의 이름은 ‘하이파이브’입니다.” 그때부터 손바닥이 마주치는 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하이파이브는 보광동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다섯 팀이 벌이는 이벤트이자 그들 사이의 긴밀한 연결 고리다. (짝!) 다섯 팀은 상호 협력하에 각자의 공간에서 산발적으로 행사를 열며, 최종적으로 하나의 협동 지점에 그 에너지를 모은다. (짝!) 참가자는 제각각인 이들 팀이 발산하는 색채만큼 다채롭고 환한 기운을 얻어간다. (짝!) 그럼 전 뭘 하면 되죠? (…)

“연구원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 같아요.” 연구원이라. 그것은 한 손에 커피를 다른 손엔 도넛 봉투를 든 사립 탐정만큼이나 나를 설레게 하는 말. 이룰 수 없는 장래 희망. 잠복 근무 중 단잠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책 무덤에 턱을 괴고 세상 모르게 조는 것도 너무 좋겠다.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미로를 헤매는 사서 보조의 조수. 나는 당장 고개를 끄덕거렸다. (짝짝짝!)

임무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하이파이브를 기록하는 것. 하이파이브를 기획하는 다섯 팀은 그것을 전적으로 내게 맡긴다고 했다. 저마다의 이벤트가 타임라인으로 정리되기만 한다면 어떤 방식이든 아무렴 상관없다고. 글쎄, 어쩌면 좋지? 무언가를 기록하는 방식이란 뭘까? 일단, 내 생각에, 연구원은 번호를 잘 매기는 사람이다.

하이파이브를 함께할 다섯 팀은 다음과 같다. ⑴워크스, 이연정과 이하림 듀오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다. ⑵햇빛서점, 그래픽 디자이너 박철희가 운영하는 게이를 위한 서점이다. ⑶프레클스, 게이 매거진 «뒤로»의 발행인 이도진이 관리하는 커뮤니티 공간이다. ⑷소목장 세미, 목수이자 디자이너인 유혜미의 가구 스튜디오다. ⑸박다함, 음악가이자 공연 기획자로 헬리콥터 레코즈를 운영한다.

또한 연구원은 목표를 설정할 줄 알아야 한다. 거기에 물음표를 붙이는 것까지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하이파이브를 기록하며 다음 다섯 가지 질문에 답해보기로 했다. ⑴과연 ‘누가’ 하이파이브를 하는가? ⑵그들은 ‘어떻게’ 하이파이브를 하는가? ⑶그들은 하이파이브를 통해 ‘무엇’을 하는가? ⑷하이파이브는 무슨 소리를 ‘내는가’? ⑸‘우리’도 하이파이브를 하게 되는가?

연구원 하면 참고 문헌을 빼놓을 수 없다. 다음은 내가 흉내 낼 것들의 목록이다. ⑴나탈리 레제의 «사무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 믿거나 말거나. ⑵«인벤톨로지»의 페이건 케네디, 그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퍼즐 조각들을 맞춘다. ⑶«예술가의 항해술»의 테스 타카라, 그는 결혼보호법 위헌 판결이 있던 날 아침 리베카 솔닛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⑷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의 살구, 살구는 예고 없이 눈앞에 쏟아지고 썩어 가고 일부는 잼으로 변하고 이야기가 된다. ⑸이강혁의 «Snakepool», 나는 ‘Snakepool’이라는 이름을 안개가 자욱한 웅덩이를 향해 유유히 걸어가는 한 사람의 이미지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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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김봇자. 잠이 조금 많은 편. 하이파이브의 연구원! 단내 나는 사립 탐정. 사서 보조의 조수. 이 공간을 채울 목소리. 떠돌이 바이트. 나는 자주 보광동에 가게 됐다. 아주 오래 전에 살던 동네. 종점은 아직도 종점이네. 로즈 옆에서 분식집을 하던 친구네 어머니는 어디서 무얼 하시는지. 덧니가 예뻤던 내 친구. 그때만 해도 보광동은 상습 침수 구역이었다. 큰비가 내리면 종점 인근이 금방 잠겼다. 하루는 소방대원에게 안긴 채 고무보트에 올랐다. 언덕 쪽으로 옮겨졌다. 막 신이 났는데, 이젠 그게 내가 겪은 일인지 아니면 꿈에서 본 장면인지 도무지 모르겠다.